슬픔도 힘이 된다
어머니는 향을 다시 피우고 뱀에게 살을 베어주고 구더기 새끼를 키운다.
거미들은 어머니 잠그늘마다 거미줄을 친다. 그 위에 둥지를 튼다. 짐승의
마음들이 고이 잠들고 나면 밤은 천수경처럼 환하다.
-송재학, 「어머니는 무엇이든 잠재우신다」 중에서
어머니는 알고 계셨다. 인생엔 기쁨보다 슬픔이 늘 많다는
것을, 하여 기쁨보단 슬픔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어야 한다
는 사실을. 어머니가 대장암 판정을 받으셨을 때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살게 한 슬픔의 대부분은 나의 기쁨이었다
는 사실을. 하나뿐인 자식의 인생에 유익과 기쁨을 구해 주
고자 한번 사용할 때마다 종양처럼 자라났던 슬픔 안에 어머
니는 늘 웅크려 앉아 계셨다는 것을. 그래서 슬픔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등은 늘 동그랗게 굽어 있다는 것을.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난 어머니가 다시 병실로 돌아오셨다.
「몹시 졸려 하실 거예요. 옆에서 주무시지 못하게 이름을
부르시면서 깨워주셔야 합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간호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술은 잘 된 건가요?」
「주치의 선생님께서 곧 오실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선생님께서 잘 설명해 주실 겁니다.」
나는 차마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어머니의 이름이라니··· 내가 그런 걸 알고는 살았던가.
나는 먹먹해진 채 침대 시트로 가린 어머니의 맨살을 이곳저곳 문질렀다.
어머니는 순한 짐승처럼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순간적으로 혼미한 잠에 빠지다가 다시 깨어나곤 하셨다.
어머니의 하얀 복부엔 아물지 않은 수술 자국이 흉터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다가 문득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밥···밥···」
「조금만 참으세요, 어머니. 오늘밤만 지나면 식사하실수 있다고 하네요.」
어머니가 감았던 눈을 떠 다시 나를 바라보셨다.
「아니··· 밥··· 먹었냐고···」
차라리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의 시린 어깨 위에 내 눈물이 천천히 떨어졌다.
「먹었으니까, 걱정 말아요. 힘들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되요.
앞으로 6시간 동안은 물 한 모금도 마시면 안 된대요.
자꾸 말하면 목 막히잖아요.」
「울지 마, 아들아··· 너도 곧 아빠가 되는데···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나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 젖은 눈으로 어머니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도 힘겹게 투명한 거미줄 같은 미소를 입에 떠올리셨다.
슬픔으로도 미소를 빚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새아가는?」
「집에 잠깐 갔어요.」
「홀몸도 아닌데, 오지 말라고 해. 병원에 오래 있으면 태아한테 안 좋아.」
「무리하지 않게 각별히 신경 쓰니까 걱정 마세요.」
「준아···」
「네, 어머니.」
마른침을 잠시 힘겹게 삼키고 난 어머니는 눈짓으로 내게 좀더 가까이 다가오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의도를 어렵잖게 알아차렸다.
어머니는 중요한 이야기를 내게 전달하고자 하실 때는
늘 내 귀에 입술을 바싹 대시곤 말씀하셨다.
「새아가 빨간 코트 있잖니? 그 코트 솔기 속에 네 배냇저고리를 넣어두었다.
그러니까 새아가 몸 풀러 병원 갈 땐 꼭 그 코트를 입혀야 한다.
잊지 말고 꼭···」
「네? 배냇저고리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실은··· 네가 화를 낼까봐 지금껏 얘기하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
즉 어머니는 당신께서 한땀한땀 손수 지으신,
내가 태어나 처음 입었던 배냇저고리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굳게 믿고 계셨단다.
그래서 내가 대학 시험을 보러 갈 때도,
사법시험을 보러 갈 때도,
심지어 결혼식 예복에까지도 솔기를 뜯어내고
그 안에 내 배냇저고리를 넣어두셨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내 인생의 중요한 고빗길에 설 때마다
가까이에서 따뜻하고 뭉클한 엄마 냄새가 난다고 느꼈었다.
나는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어머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어머니의 대장 속에서 자라났던 종양은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았다.
그건 슬픔의 힘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내 아내는 빨간 코트를 입고 병원에 가 건강한 아기를 순산했고,
어머니는 미리 알고 있으셨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으셨다.
당신께서 손수 지어주신 배냇저고리를 입은 손주를 처음 받아 안으셨을 때
아기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셨다.
「아기한테 뭐라고 하셨어요?」
「응? 아··· 허허, 아무것도 아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밥··· 내 새끼, 밥 먹었냐고.」
먹고사는 게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었던,
위대한 어머니의 슬픔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사랑하니까 사람이다(오영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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